
2019년 4월 10일, 전 세계의 이목이 한 장의 사진에 집중되었습니다. 검은 바탕에 흐릿하게 빛나는 주황색 도넛 모양의 고리.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촬영된 M87 은하 중심의 블랙홀(M87*) 이미지였습니다.
빛조차 탈출하지 못하는 블랙홀을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요?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우주 망원경이 찍었을 거라 생각하지만, 정답은 **"지구 전체를 망원경으로 만들어서 찍었다"**입니다.
이번 편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(EHT) 프로젝트와, 저 흐릿한 오렌지색 고리 속에 숨겨진 과학적 비밀을 파헤쳐 봅니다.
1. 미션 임파서블: 달 위에 놓인 야구공을 찾아라
블랙홀 촬영이 어려웠던 이유는 블랙홀이 '검어서'가 아니라 **'너무 멀고 작아서'**였습니다. 촬영 대상인 M87 블랙홀은 지구에서 5,50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. 이것을 지구에서 보는 건, 달 표면에 놓인 야구공의 실밥을 지구에서 육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의 난이도입니다.
이 정도 해상도를 얻으려면 이론적으로 지구 지름만 한 렌즈를 가진 망원경이 필요합니다.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죠. 그래서 과학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.
"망원경 하나를 크게 만들 수 없다면, 전 세계의 망원경을 연결해서 지구 크기만 한 '가상의 망원경'을 만들자!"
2. 지구를 하나의 렌즈로: VLBI 기술
이 아이디어를 실현한 것이 바로 초장기선 간섭계(VLBI) 기술입니다. 미국, 멕시코, 칠레, 스페인, 남극 등 전 세계 8곳에 흩어진 전파 망원경들이 약속된 시간에 동시에 M87 블랙홀을 바라봅니다.
- 원자시계의 동기화: 각 망원경은 수억 년에 1초 틀릴까 말까 한 정밀한 원자시계를 이용해, 나노초(ns) 단위까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전파 신호를 포착합니다.
- 지구 자전의 활용: 지구가 회전함에 따라 각 망원경이 훑는 영역이 달라지는데, 이 데이터를 모두 합치면 마치 지구만 한 크기의 거대한 렌즈로 찍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.
3. 인터넷 전송 불가: 비행기로 나르는 하드디스크
EHT가 관측한 데이터의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. 하룻밤 관측 데이터만 **수 페타바이트(PB)**에 달합니다. 이는 5,000년 동안 쉬지 않고 MP3 음악을 들어야 하는 용량입니다.
이 방대한 데이터는 인터넷으로 전송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. 그래서 연구진은 하드디스크 수천 개를 물리적으로 분리하여, 비행기에 싣고 독일과 미국의 슈퍼컴퓨터 센터로 직접 배달했습니다. (남극의 데이터는 겨울이 지나 비행기가 뜰 때까지 반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.)
4. 사진인가, 그림인가? (이미지의 재구성)
슈퍼컴퓨터에 모인 데이터는 곧바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. 전파망원경은 가시광선을 찍는 카메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. 연구진은 **'역문제(Inverse Problem)'**라는 복잡한 수학적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재구성했습니다.
- 퍼즐 맞추기: 듬성듬성한 관측 데이터(조각)를 가지고, 물리적으로 가장 타당한 블랙홀의 모습(완성된 그림)을 수학적으로 역산해 내는 과정입니다.
- 검증: 연구진은 4개의 독립된 팀으로 나뉘어 서로 교류 없이 각자 이미지를 만들었고, 나중에 맞춰보니 4팀 모두 똑같은 **'도넛 모양'**을 그려냈습니다. 이는 이 이미지가 조작이 아닌 확실한 관측 결과임을 증명합니다.
5. 도넛 모양의 비밀: 왜 아래쪽이 더 밝을까?
완성된 M87 사진을 자세히 보면, 고리의 밝기가 균일하지 않고 아래쪽(남쪽)이 더 밝은 초승달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. 여기에는 중요한 물리학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.
- 그림자 (Shadow): 가운데 검은 부분은 빛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는 영역, 즉 **'블랙홀의 그림자'**입니다.
- 빛의 고리: 주황색 고리는 블랙홀 주변을 빛의 속도로 회전하는 가스(강착원반)와, 중력에 의해 뒤편에서 휘어져 들어온 빛(광자 고리)이 합쳐진 것입니다.
- 도플러 비밍 (Doppler Beaming): 왜 한쪽만 밝을까요? 블랙홀 주변의 가스가 거의 광속으로 회전하기 때문입니다. 우리 지구 쪽으로 다가오는 방향의 가스는 도플러 효과에 의해 더 밝게 보이고, 멀어지는 쪽은 어둡게 보입니다.
즉, 저 비대칭적인 밝기는 M87 블랙홀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.
6. 미래: 사진을 넘어 '영화'로
2019년의 사진은 시작일 뿐입니다. EHT 팀은 관측소를 늘리고 성능을 업그레이드하여 차세대 프로젝트를 준비 중입니다.
- Sgr A*: 2022년에는 우리 은하 중심의 블랙홀 사진도 공개되었습니다.
- 블랙홀 영화: 해상도가 더 좋아지면, 정지 화면이 아니라 블랙홀 주변에서 가스가 회전하고 제트가 뿜어져 나오는 **동영상(Movie)**을 찍을 수 있게 됩니다.
마치며: 인류의 시야가 확장되다
아인슈타인이 이론을 만들고 100년이 지나서야, 우리는 비로소 그 이론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. M87 블랙홀 사진은 단순한 천체 사진이 아닙니다. "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" 전 세계 과학자들이 국경을 넘어 협력하여 만들어낸, 인류 지성의 승리입니다.
다음 6편에서는 블랙홀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로, **< 블랙홀은 인류 최후의 배터리? 펜로즈 과정과 미래 문명의 에너지 혁명 >**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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